지난 편에서 IP-R&D가 미래의 길목을 먼저 찾아 선점하는 쪽으로 진화해야 한다는 이야기를 했습니다. 오늘은 거기서 한 발 더 나아간 이야기를 하려고 합니다. 그 길목을 막는 블로킹 특허를 확보하는 일은, 사실 국가가 나서야 하는 사안이라는 겁니다.
늘 그래왔듯 한 번 짚고 가죠. 이 이야기는 인공지능으로 기술 발전에 가속이 붙는 세상을 전제로 한 추론이지 단정이 아닙니다. 다만 오늘 다룰 정부 펀드는 추론이 아니라 며칠 전 발표된 사실입니다.
블로킹 특허를 쥔 자는 시장에서 쫓아낼 수 있다
먼저 이 이야기가 왜 국가적 사안인지부터 짚겠습니다. 이 블로그에서 줄곧 이야기한 블로킹 특허는, 누구든 그 시장에 들어오려면 반드시 지나야 하는 길목을 막은 특허입니다. 그런데 그 길목을 막은 사람이 통행료만 받는 게 아니에요. 마음먹으면 아예 통행을 막아버릴 수도 있습니다.
생각해 보세요. 어느 외국 기업이나 외국 자본이 인공지능 시대의 핵심 길목을 막는 특허를 손에 쥐었다고 합시다. 그리고 그 길목이 우리 주력 산업이 반드시 지나야 하는 자리라면? 그 특허권자는 우리 기업에 천문학적인 통행료를 물릴 수도 있고, 더 나아가 "당신들은 이 길로 못 지나간다"며 시장에서 통째로 내쫓을 수도 있습니다. 우리가 아무리 좋은 제품을 만들어도, 그 길목 하나에 막혀 사업을 접어야 하는 상황이 오는 거죠.
이건 한 기업의 손익 문제가 아닙니다. 나라의 주력 산업이 통째로 인질이 될 수 있는, 국운이 걸린 문제입니다. 그래서 그 무기를 남이 쥐기 전에 우리가 먼저 확보해야 합니다.
미국엔 이런 비즈니스가 발달했지만, 위험하고 비싸다
사실 이런 일을 전문으로 하는 비즈니스가 없는 건 아닙니다. 특허 강국인 미국에는 특허를 다루는 사업이 아주 잘게 분화되고 발달해 있어요. 펀드를 조성해 특허 포트폴리오를 구축하는 곳도 있고, 특허를 사고파는 데 전문인 회사가 좋은 특허를 매집해 라이선스 프로그램을 운영하는 것도 흔한 일입니다. 특허를 하나의 자산처럼 사고팔고 굴리는 시장이 두텁게 형성돼 있는 거죠.
그런데 이게 성공이 늘 보장되는 건 아닙니다. 좋은 특허를 골랐다고 생각해 사들였는데 막상 수익이 안 나는 경우도 많고, 해외 대기업을 상대로 한 소송은 그 자체로 위험하고 비용도 어마어마합니다. 미국처럼 이 시장이 발달한 나라에서도 실패하는 플레이어가 수두룩해요. 한마디로, 잘되면 크지만 위험하고 비싼 게임이라는 겁니다.
문제는, 이 위험하고 비싼 게임의 중요도가 앞으로 엄청나게 올라간다는 데 있습니다. 인공지능 시대에 핵심 길목을 막는 블로킹 특허 하나의 가치는 우리가 아는 단위를 넘어서니까요. 위험하지만 반드시 누군가는 해야 하고, 안 하면 그 자리를 외국이 차지해 버리는 일. 그렇다면 누가 이 게임을 떠안아야 할까요.
민간이 떠안기엔 너무 무겁다
개별 민간 기업이 이 게임을 혼자 떠안기는 어렵습니다. 이유가 분명해요.
첫째, 당장은 돈이 안 됩니다. 미래의 길목이 될 특허를 사 모으고, 시장이 열리기를 기다리고, 그걸로 수익을 거두기까지는 긴 시간이 걸립니다. 분기 실적에 쫓기는 민간 자본이 견디기 힘든 호흡이죠.
둘째, 실패할 수 있습니다. 앞 편들에서 봤듯이 대부분의 특허는 빈 땅이고 진짜 길목은 극소수입니다. 여러 곳에 베팅해 그중 하나가 크게 터지는 게임이라, 개별 베팅은 얼마든지 빗나갈 수 있어요. 민간이 혼자 짊어지기엔 위험이 큽니다.
셋째, 큰돈이 듭니다. 의미 있는 규모의 포트폴리오를 깔려면 한두 푼으로는 안 되고, 해외 대기업을 상대로 한 소송은 그 자체로 막대한 비용이 드는 싸움이니까요.
당장 돈이 안 되고, 실패 위험이 크고, 큰돈이 들지만, 성공하면 나라의 명운을 좌우할 만큼 큰 보상이 따르는 일. 이런 일은 민간에만 맡겨두면 아무도 선뜻 충분한 규모로 나서지 못합니다. 그래서 국가의 역할이 필요합니다.
고도성장기 공기업을 떠올려 본다
저는 이 대목에서 과거 우리나라가 가난을 벗어나던 고도성장기를 떠올리게 됩니다. 철강, 전력, 도로 같은 기간산업은 당장은 수지가 안 맞고 막대한 돈이 들어가는 일이었습니다. 위험하고, 민간이 혼자 감당할 수 없는 규모였죠. 그래서 국가가 공기업을 세워 그 일을 맡았습니다. 당장의 수익이 아니라 나라의 미래를 보고 한 일이었고, 그 토대 위에서 우리 경제가 도약했습니다.
인공지능 시대의 블로킹 특허도 그와 닮은 자리에 있다고 봅니다. 미래 산업이 반드시 지나야 할 길목을 미리 확보해 두는 일. 위험하고 비싸지만, 나라의 미래 먹거리가 거기 달려 있는 일. 그렇다면 과거에 철강과 전력을 공기업이 맡았듯, 국가가 블로킹 특허 확보에 앞장서 주면 어떨까 하는 겁니다.
물론 국가가 직접 특허를 매집하고 소송까지 끌고 가는 게 부담스럽다면, 꼭 그 형태가 아니어도 좋습니다. 민간이 이 위험한 게임에 뛰어들 수 있도록 정책적으로 배후에서 지원하는 방식도 있을 테고요. 직접 나서든, 뒤에서 받쳐주든, 핵심은 이 일이 개별 기업에만 떠넘겨서는 안 되는 국가적 사안이라는 점입니다. 수출로 먹고사는 나라가 인공지능 시대를 건너려면, 어떤 형태로든 국가의 손이 닿아야 합니다.
며칠 전, 정부가 1,367억을 움직였다
반가운 건, 정부가 이미 이 방향으로 움직이기 시작했다는 점입니다. 지난 6월 18일, 지식재산처가 올해 1,367억원 규모의 지식재산 투자펀드를 조성한다고 발표했습니다. 펀드는 세 갈래입니다. 특허를 직접 사들이는 IP직접투자 167억원, 특허 거래와 사업화에 쓰는 200억원, 특허기술 사업화에 쓰는 1,000억원. 여기에 정부의 모태펀드 특허계정이 마중물로 325억원을 보탰습니다.
이 가운데 가장 눈여겨볼 건 첫 번째, IP직접투자 펀드입니다. 보통의 벤처펀드가 유망한 회사 지분에 투자하는 것과 달리, 이 펀드는 특허 그 자체를 사들입니다. 국내의 좋은 핵심특허를 먼저 사 모은 뒤, 그 특허로 해외 기업을 상대로 라이선싱이나 침해소송을 걸어 수익을 내고, 그 돈을 다시 국내로 회수해 또 투자하는 선순환을 만들겠다는 거예요. 제가 앞에서 말한 "국가가 블로킹 특허를 확보한다"는 방향과 정확히 맞닿아 있습니다. 토대도 이미 꽤 깔려 있습니다. 정부는 2006년부터 모태펀드 특허계정을 운영해, 작년까지 누적 2조 7,548억원 규모의 펀드를 조성하고 1,479개 기업에 2조 2,808억원을 투자했으며, 그중 130곳이 코스닥에 상장했습니다.
반갑다, 그런데 이 정도로는 부족하다
방향도, 의지도 옳습니다. 그래서 무척 반가운 소식이에요. 다만 솔직하게 말씀드리면, 규모가 충분하다고는 생각하지 않습니다.
1,367억원은 큰돈처럼 보이지만, 앞으로 인공지능이 열어젖힐 시장의 크기와 거기서 길목 하나가 가질 가치를 떠올려 보면 결코 큰 액수가 아닙니다. 해외 대기업 하나를 상대하는 소송 비용, 의미 있는 포트폴리오를 깔기 위한 매입 비용을 생각하면 더욱 그렇고요. 국운이 걸린 일이라고 보면서 이 정도 규모에 머무는 건 아까운 일입니다. 저는 훨씬 더 파격적인 투자가 필요하다고 봅니다. 찔끔 담그는 게 아니라, 국가적 역량을 모아 크게 베팅해야 하는 사안이라는 거죠. 어차피 극소수가 전체를 좌우하는 세계입니다. 작게 여러 번 거는 것보다, 제대로 된 규모로 핵심 길목을 선점하는 쪽이 비교할 수 없이 큰 결과를 냅니다.
방어는 기업이, 공격은 국가가
여기서 한 가지 짚고 갈 게 있습니다. 사실 우리나라에는 국내 특허를 사 모아 해외 분쟁에 대응하려던 회사가 이미 있었거든요. 인텔렉추얼 디스커버리라는 곳인데, 흥미롭게도 2010년에 정부 주도로 설립됐습니다. 다만 그 출발점은 지금 이야기하는 것과 결이 조금 달랐어요. 해외의 특허괴물이 우리 기업을 공격할 때 막아주는, 일종의 방어형 조직으로 시작했거든요.
그런데 인공지능 시대에는 역할을 다시 나눠야 한다고 봅니다. 방어는 이제 개별 기업이 맡아야 할 몫입니다. 수출 기업이 해외에서 얻어맞지 않도록 미리 위험특허를 분석하고 회피설계를 하는 일인데, 다행히 우리나라에는 이걸 도와주는 지식재산보호원 같은 기관이 있습니다. 기업이 그 도움을 받아 스스로 갑옷을 두르면 됩니다. 이 방어 이야기는 다음 편에서 자세히 다루겠습니다.
대신 국가는 한 단계 위로 올라가야 합니다. 막아주는 데서 그치지 말고, 공격이 가능한 블로킹 특허를 확보하는 쪽을 받쳐줘야 해요. 누군가에게 시장에서 쫓겨나지 않으려면, 우리도 남을 길목에서 막을 수 있는 무기를 쥐고 있어야 하니까요. 방어는 기업이 하고, 그 무기를 미리 확보하는 공격은 국가가 직접 나서든 정책으로 받쳐주든 사력을 다해 떠받친다. 이렇게 역할이 나뉘어야 합니다.
같은 말을 뒤집으면 — 지금이 그 짧은 창이다
왜 지금이냐를 뒤집어 말씀드리겠습니다. 한때 흐지부지되는 듯했던 그 정부 주도 회사도, 최근엔 국내 연구기관과 대학의 특허를 사들여 해외 통신 대기업들을 상대로 수백억원대 수익을 거두기 시작했습니다. 표준특허를 글로벌 대기업에 매각하는 성과도 냈고요. 한때 일렀던 모델이 이제 때를 만난 겁니다.
지금이 예전과 결정적으로 다른 건 두 가지입니다. 하나는 인공지능이 특허의 가치를 또렷이 가려주기 시작해, 빈 땅을 비싸게 사들이는 실수를 줄일 수 있게 됐다는 점. 다른 하나는 미래의 길목을 미리 찾아 블로킹 특허를 깔아두는 일이 지금이라면 가능하다는 점입니다. 기술이 본격적으로 가속하기 전, 권리화가 아직 기술을 따라잡을 수 있는 이 짧은 시기에만 열려 있는 기회예요.
다만 이 창은 길지 않습니다. 제 개인적인 예측으로는, 미래의 길목이 될 특허를 매집하고 키워야 할 기간은 길어야 5년쯤입니다. 그 안에 포트폴리오를 다 깔아야 해요. 이 시기를 놓치면 좋은 길목은 영리한 경쟁자가 먼저 차지하거나, 기술이 너무 빨라져 권리화가 못 따라잡게 됩니다. 그러니 머뭇거릴 시간이 없습니다. 지금이야말로 국가가 역량을 모아 크게 움직여야 할 때입니다.
정리하면
누구도 피할 수 없는 블로킹 특허를 쥔 쪽은 우리 기업을 시장에서 내쫓을 수도 있습니다. 그래서 그 무기를 먼저 확보하는 일은 국운이 걸린 사안인데, 위험하고 비용도 커서 개별 민간에만 떠넘기기는 어렵습니다. 미국엔 특허를 자산처럼 굴리는 비즈니스가 발달했지만 그곳에서도 실패가 흔하고, 우리는 그 시장조차 아직 얇고요. 그래서 과거 고도성장기에 공기업이 철강과 전력을 맡았듯, 국가가 직접 나서거나 정책으로 민간을 받쳐주는 손이 필요합니다. 정부가 1,367억원 펀드로 막 움직이기 시작한 건 반갑지만, 국운이 걸린 사안임을 생각하면 훨씬 더 파격적인 규모가 필요하고요. 방어는 기업이 맡고, 블로킹 특허를 확보하는 공격은 국가가 사력을 다해 받쳐야 합니다. 그리고 그 매집의 창은 길어야 5년입니다.
여기까지가 국가가 공격할 무기를 갖추는 쪽의 이야기였습니다. 그런데 방금 잠깐 언급한 반대쪽 날개, 그러니까 우리 기업이 해외에서 얻어맞지 않도록 지켜 주는 방어 쪽도 그에 못지않게 중요합니다.
다음 편에서는 그 이야기를 해보겠습니다. 우리 기업의 수출을 오래 지켜 온 한 기관과, 그 방향을 둘러싼 이야기 말입니다.